롤랑가로스의 두 얼굴: 폭염에 쓰러진 톱랭커, 그리고 코트를 수놓은 당당한 패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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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붉은 앙투카 위로 쏟아지는 폭염은 자비가 없었다. 올해 롤랑가로스 코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건 선수들의 랠리만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무더위에 짓눌린 세계 1위의 처절한 몰락이, 다른 한쪽에서는 규범을 깨부수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세계 랭킹 1위 얀니크 신네르가 후안 마누엘 세룬돌로와의 2회전 5세트 혈투 끝에 믿기 힘든 역전패를 당하며 짐을 쌌다. 초반 분위기만 해도 신네르의 압승이 굳어지는 듯했다. 1, 2세트를 여유롭게 따낼 때까지만 해도 그는 말 그대로 코트를 지배했다. 강력한 스트로크 폭격에 세룬돌로는 속수무책으로 베이스라인 뒤로 밀려났고, 신네르는 뙤약볕 아래서 상대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체력을 갉아먹었다.
승부의 추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생각했던 3세트 게임 스코어 5-1, 매치를 끝낼 수 있는 신네르의 서브 게임. 하지만 얄궂게도 바로 이 순간 흐름이 완전히 뒤집혔다. 파리의 무더위가 결국 세계 1위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극심한 근육 경련에 시달리며 코트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빈틈을 포착한 세룬돌로가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내리 세 세트를 가져갔다. 최종 스코어 3-6, 2-6, 7-5, 6-1, 6-1. 잔인하리만치 극적이고 허무한 퇴장이었다.
이처럼 한쪽 코트가 무더위와의 처절한 생존 게임으로 얼룩졌다면, 시몬 마티유 코트는 그야말로 화려한 런웨이를 방불케 했다. 나오미 오사카는 도나 베키치와의 2회전 매치를 앞두고 또 한 번 파격적인 패션을 선보이며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다.
앞서 라우라 지게문트와의 1회전에서 오사카는 반짝이는 골드 드레스에 화려한 비즈 보디스, 그리고 예식용 블랙 트레인 스커트까지 걸치고 등장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경기 직후 6-3, 7-6으로 패배한 지게문트가 “아우터를 벗고 웜업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오사카의 ‘패션쇼’가 규정 위반이라고 날 선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잡음도 오사카의 당당한 행보를 막진 못했다. 관중석은 그녀의 화려한 등장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팬들로 북적였고, 뜨거운 환호 속에 트레인과 재킷을 벗어 던진 오사카는 2024년 윔블던 준결승 진출자였던 베키치를 상대로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1세트를 타이브레이크(7-1)로 깔끔하게 가져간 뒤, 2세트마저 6-4로 마무리하며 가뿐하게 3회전 티켓을 따냈다.
밤에 반짝이는 에펠탑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녀의 골드 드레스는 롤랑가로스라는 무대를 어떻게 즐기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장치였다. 오사카는 햇빛에 드레스가 너무 심하게 반사돼 심판에게 쫓겨날까 봐 평범한 여벌의 드레스를 두 벌이나 챙겼다며 웃어넘기는 여유를 보였다. 경기 후 코트 위 인터뷰에서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묘한 긴장감을 주는 게 즐겁다. 내 코트 룩을 중심으로 하나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느낌이라, 팬들이 이걸 함께 즐겨주는 게 정말 기쁘다”고 털어놨다.
코트 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동료도 그녀의 퍼포먼스에 지지를 보냈다. 세계 랭킹 1위 아리나 사발렌카는 방송 데스크에서 오사카의 화려한 등장을 지켜보며 “이게 바로 패션계의 묘미 아니겠나. 코트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당당한 모습이 너무 멋지다”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땀과 경련으로 무너져 내린 처절한 역전패, 그리고 코트의 보수적인 규범을 비웃듯 펼쳐진 매혹적인 승리. 지금 파리의 붉은 흙먼지 속에서는 이처럼 가장 극단적이고도 흥미로운 테니스의 민낯이 동시에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