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에 뿌려진 연대와 온기: 베트남에서 싹튼 구자욱의 야구공, 훌훌 털고 일어난 화이트의 첫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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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가슴 뛰는 꿈을 품지만, 그 꿈의 무게가 유독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야구가 딱 그렇다. 배트 하나, 글러브 하나 장만하는 것조차 꽤나 묵직한 진입장벽을 요구한다. 하물며 야구 불모지로 꼽히는 베트남에서 선수를 꿈꾼다는 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척박한 가시밭길에도 누군가 슬며시 내민 따뜻한 손길 하나면, 꽤 끈질기게 희망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 타자 구자욱이 바로 그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다.
그의 조용한 선행은 벌써 2019년부터 이어져 왔다. 동네에 다문화 가정도 많고, 부모님의 슬쩍 건넨 권유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베트남 야구 쪽에 눈길이 갔다는 게 구자욱의 덤덤한 설명이다. 2022년 베트남 호아센대학교 야구팀 창단 때는 무려 사비 2000만 원을 털어 용품을 쾌척했고, 올해도 어김없이 대구시체육회 임원진으로 활동 중인 이용대 베트남유·소년야구팀후원회장을 통해 호찌민시 12구청 유소년 팀에 장비들을 듬뿍 보냈다. 낡은 공 하나 구하기도 팍팍한 현지 아이들에게 고품질의 KBO산 장비들은 단순한 물건 그 이상의 동아줄이 됐다.
그리고 기어코 반가운 사고를 쳤다. 구자욱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땀 흘린 꼬맹이들 중 몇몇이 태극마크, 아니 베트남 국가대표 마크를 달게 된 것이다. 18년 넘게 베트남 야구판을 일궈온 권동혁 감독의 목소리엔 벅찬 감동이 묻어났다. 다가오는 올해 12월 방콕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에 나설 대표팀 선수들이 6월 말부터 한국으로 2주간 전지훈련을 오는데, 구자욱 선수가 활약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된다면 아마 펄쩍펄쩍 뛸 거라는 이야기였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한 건 없고 다 선수들이 땀 흘린 덕분이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KBO 1군 스타의 든든한 연대는 현재의 어린 선수들을 돕는 것을 넘어 베트남 야구의 미래를 다지는 단단한 주춧돌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의 믿음과 온기가 절망을 뚫고 싹을 틔우는 이 묘한 야구의 생리는, 바다 건너 불모지만이 아니라 당장 어제 열린 치열한 프로 무대 한복판에서도 똑같이 박동했다.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투수 오웬 화이트가 써 내려간 반전 드라마가 그렇다.
화이트는 야심 차게 밟은 KBO리그 데뷔전이었던 지난 3월 31일 대전 KT전에서, 3회초 0-1로 뒤진 1, 2루 상황에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주저앉았다. 진단명은 좌측 햄스트링 근육 파열. 그렇게 화이트의 코리안 드림은 시작도 전에 잔혹하게 멈춰 서는 듯했다. 하지만 화이트가 기나긴 재활의 터널을 걷는 동안, 팀은 톱니바퀴처럼 움직여 그를 지탱했다. 대체 선수 잭 쿠싱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묵묵히 마운드 공백을 메웠고, 동료들은 모자 챙에 화이트의 등번호 ’24’를 꾹꾹 눌러 쓰며 그의 자리를 비워뒀다.
이 무언의 연대에 화이트는 착실한 재활로 화답했다. 구단의 재활 프로그램을 철석같이 믿고 따른 그는 지난달 30일 청운대와의 연습경기 2이닝 무실점을 시작으로 퓨처스리그 두산, NC전을 거치며 차근차근 구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16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해 사실상 두 번째 데뷔전을 치렀다.
결과는 6⅓이닝 3피안타 1볼넷 4탈삼진 2실점(1자책). 완벽에 가까운 퀄리티스타트였다. 6회까지 단 76구만으로 상대 타선을 꽁꽁 묶은 화이트는 7회 1루수 실책과 볼넷이 겹치며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뒤이어 등판한 불펜진을 굳게 믿고 쿨하게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팀의 10-5 승리와 함께 그토록 바랐던 KBO 마수걸이 승리를 챙긴 순간이다.
경기가 끝난 뒤 화이트의 입에서 나온 건 안도감이나 개인의 영광보단 동료를 향한 짙은 신뢰였다. 최근 좋은 리드를 보여준 포수 허인서의 볼 배합을 전적으로 믿고 던졌다는 그는, 모자에 적힌 자신의 번호를 보며 하루빨리 돌아와 팀에 보탬이 돼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베트남 아이들의 낡은 글러브를 채워준 구자욱의 넉넉한 마음이나, 부상으로 이탈한 동료를 위해 모자에 번호를 새긴 한화 선수들의 끈끈함은 같은 궤적을 그린다. 야구는 결국 투수 혼자 던지고 타자 혼자 치는 고독한 싸움이 아니다. 바다 건너 누군가의 꿈을 지탱하는 야구공 하나, 마운드 위의 동료를 믿고 뻗는 글러브 하나. 누군가 던지고 누군가 묵묵히 받아주는 한, 이 무모하고도 매력적인 공놀이는 계속해서 기적 같은 궤적을 빚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