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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원의 러닝타임] 라니에리, 그리고 '빅쇼트'
정일원 기자 | 승인 2018.07.13 12:42

러닝타임(running time) : 영화와 드라마의 상영 길이를 시간으로 나타낸 단위.
축구 : 11명의 ‘뜀박질’이 만드는 한 편의 영화 혹은 일련의 드라마. [편집자 주]


1970년대 후반 미국 채권 딜러이자 투자은행인 살로몬 브라더스의 루이스 라니에리는 주택저당권을 한데 모아 채권으로 증권화, 주택저당채권 담보부증권(Mortgage Backed Securities, 이하 MBS)을 고안해낸다. MBS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월가의 거대 은행들은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MBS를 여러 개 묶어 부채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이하 CDO)이라는 파생상품을 만들었고, CDO의 인기에 힘입어 미국 금융시장은 호황기를 맞는다.

호황은 그야말로 ‘거품(Bubble)’이었다. 은행권의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은 대출 최하위 등급인 서브프라임(subprime) 등급까지 확대됐다. 서브프라임 등급의 채무불이행이 증가하자 주택담보대출을 근간으로 하는 MBS와, MBS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CDO도 연달아 부실해졌다. CDO를 만든 월가의 대형 은행들은 줄줄이 파산했고, 거품의 기저를 헤매던 서민들은 집을 잃고 쫄딱 거리에 나앉았다.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를 위협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렇듯 서두에서 언급한 
라니에리의 MBS가 시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빅쇼트] 메인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2015)는 세상이 거품 위에서 헤엄칠 때, 거품 속을 헤어 나온 ‘괴짜’들의 이야기다. 너도나도 CDO의 가치를 맹신했지만, 이들만은 CDO를 ‘쓰레기’라 불렀다. [빅쇼트] 등장인물의 모델이 된 마이클 버리, 스티브 아이스먼, 그랙 리프먼, 벤 호켓은 당시 거품이 낀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쪽에 베팅을 한다. 이처럼 가치가 떨어질 것을 예측해서 투자를 하는 전략을 ‘빅쇼트’라 하는데, 잘나가는 금융시장이 곧 무너질 거라 주장한 괴짜들은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의 금융시장은 철저히 무너졌고, 괴짜들은 부도가 나면 투자자가 수익을 얻는 신용부도스와프(Credit Default Swap, CDS)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게 된다.

▲ 레스터 시티를 이끌고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2015-2016 시즌 우승을 차지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 / 사진: 레스터 시티 공식 소셜미디어 갈무리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에도 비슷한 ‘빅쇼트’가 있었다. 순위표 맨 꼭대기에 위치한 어느 축구팀이 곧 1위에서 하위권으로 떨어질 거라는 예측이 축구전문가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영화와는 다르게, 축구계는 순위표에 ‘거품’이 꼈다며 전문가들의 빅쇼트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2015-2016 시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레스터 시티(이하 레스터)라는 축구팀을 ‘선 수비 후 역습’의 4-4-2 전술로 포장, EPL의 1등 상품으로 만들었다. 2014-2015 시즌 극적으로 1부리그 잔류에 성공한 팀이 시즌 초반 1위로 올라섰을 때만 해도, 레스터가 끝까지 선두를 달릴 거라고 예측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독일 축구의 전설 디트마 하만을 비롯해 티에리 앙리, 제이미 캐러거, 프랑크 램파드 등은 하나같이 시즌 후반기에 가면 레스터가 제자리인 하위권을 찾아갈 거라 예상했다.

전문가들의 빅쇼트는 꽤나 합리적인 분석이었다. 레스터라는 상품이 2부리그에서 10년 만에 승격한 팀이었고, 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제이미 바디는 8부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무명의 선수였다. 스쿼드를 이루는 다른 선수들 역시 상위권 팀들과 비교했을 때, 실력과 명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부실한’ MBS로 이루어진 CDO처럼, 레스터 역시 금방이라도 그 가치가 폭락할 듯 보였다.

▲ 속옷만 입고 방송을 진행한 게리 리네커. 사실 리네커는 ‘레스터의 아들’로 불릴 정도로 레스터 시티에 애정이 깊다. 리네커가 선수 생활을 시작한 곳도 다름 아닌 레스터 시티였다. / 사진: BBC 갈무리

결과는? 레스터가 거품이라고 비웃었던 전문가들은 그 거품에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레스터가 우승하면 옷을 벗고 방송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게리 리네커는 영국 BBC의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에서 속옷만 입고 방송을 진행했으며, 레스터가 아니라 다른 빅 클럽이 우승하는 쪽에 돈을 건 도박꾼들은 주머니가 탈탈 털렸다.

반면 전문가들의 빅쇼트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례로 38세의 리 허버트는 대다수의 EPL 팬들이 레스터의 순위 하락을 예상할 때, 꿋꿋하게 레스터의 우승에 베팅했다. 비록 레스터가 지난 시즌 겨우 2부리그 강등을 면한 약팀이지만, 레스터의 오랜 팬인 허버트에게 팀의 객관적인 전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 레스터 시티의 우승에 베팅한 리 허버트 / 사진: 데일리메일 갈무리

레스터가 정말로 우승을 차지하자 허버트가 베팅한 단돈 5파운드(한화 약 7200원)는 (최대)2만 5,000파운드(한화 약 3580만 원)로 되돌아왔다. 네스호의 괴물이 발견될 확률(500분의 1),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크리스마스 차트에서 1위에 등극할 확률(1,000분의 1), 킴 카사디안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2,000분의 1)보다 훨씬 더 낮은 확률(5,000분의 1)인 레스터의 우승이 가시화되자 윌리엄 힐을 비롯한 영국의 대표 베팅 업체들은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박꾼들을 상대로 합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적어도 축구판에서만큼은 1위 팀이 ‘언더독(Underdog·이길 가능성이 낮은 약자)’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빅쇼트를 외쳐선 안 될 것 같다. 그리스의 유로 2004 우승, 볼프스부르크의 2008-2009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우승, 몽펠리에 HSC의 2011-2012 시즌 프랑스 리그앙 우승... 언더독이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탑독(Top Dog)’으로 장을 마감하는 게 이 바닥(Pitch)에선 제법 흔한 일이니까.

정일원 기자  1one@beff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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