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백
    여백
  • 여백
HOME Football 기획
[정일원의 러닝타임] 나만의 빌드업,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
정일원 기자 | 승인 2018.03.01 12:00

러닝타임(running time) : 영화와 드라마의 상영 길이를 시간으로 나타낸 단위.
축구 : 11명의 ‘뜀박질’이 만드는 한 편의 영화 혹은 일련의 드라마. [편집자 주]

*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언젠가 소셜미디어 피드 속에 박제해두었던 토막글 2편이 떠올랐다. 마우스 스크롤을 열나게 굴려 찾아낸 것은 루비 왁스가 쓴 ‘너덜너덜 기진맥진 지친 당신을 위한 마음챙김 안내서’를 소개한 카드뉴스와 한지혜 소설가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평균의 속도에 맞추라는 사회’.

# “좋은 아침이야 루비, 오늘 아침 샤워는 어땠니?”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루비 왁스는 중증 우울증 환자였다. 한창 잘 나가던 때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삶을 끊어내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다.

▲ 사진: flickr

삶의 나락에서 그를 건져낸 건 ‘샤워’였다. 쏟아지는 물줄기의 따뜻함, 샤워 부스의 안온함에 ‘감각적으로 집중’함에 따라 우리의 뇌는 긴장을 풀고 스트레스를 조절한다는 것. 장기적 목표에 함몰된 사소한 일상의 원초적 즐거움, 훗날의 결과가 아니라 오늘의 과정에 몰입하고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챙김' 명상법을 기반으로 한 인지 치료법(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MBSR). 옥스퍼드대학교 심리학과에서 MBSR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루비 왁스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MBSR 관련 책까지 출간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 분)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매 끼니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몇 분이면 뚝딱 완성되는 도시락은 분명 간편하고 칼로리도 높아서 배는 빨리 부른데, 당최 이 허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은 “왜 돌아왔냐?”는 질문에 “배가 고파서”라고 답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은 닥치는 대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찬은 몇 가지 없다. 배추 잎 몇 개 따다가 프라이팬에 구워 먹고, 아카시아꽃 따다가 기름에 튀겨 먹고, 비 오면 밀가루 반죽 쓱쓱 떼어 수제비 해 먹고. [리틀 포레스트]의 카메라는 혜원의 요리에 눈과 코를 처박는다. 마치 ‘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ASMR)’ 영상을 보는 것 같다. 보고 있으면 침이 저절로 꿀꺽,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계란프라이 밖에 없는 데도 당장 집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싶을 정도다.

▲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시간이 없다”며 맛을 ‘삼켜온’ 우리들에게 [리틀 포레스트]는 “맛은 음미하는 거야”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지지고, 볶고, 자르고, 끓인 다음 귀로, 코로, 눈으로, 입으로 먹는 게 밥이고 '끼니'라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들에 심취하는 것이 각박한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라고.

1979년 매사추세츠 대학병원의 존 카밧-진이 불교의 명상법을 이용해 만든 스트레스 감소프로그램인 MBSR. MBSR의 핵심이 되는 명상인 ‘마음챙김’에서 강조하는 7가지 태도는 판단하지 않기(nonjudging), 인내(patience), 초심자의 마음(beginner's mind), 믿음(trust), 지나치게 애쓰지 않기(non-striving), 수용(acceptance), 내려놓음(letting go)이다.

[리틀 포레스트]가 보여주는 요리만큼 ‘마음챙김’에 특화된 게 또 있을까. 간이 딱 좋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물 끓을 때까지 인내하고, 이제 칼질 좀 한다고 초심자의 마음을 잃어선 안 되고, 맛있을 거라는 믿음, 그렇다고 너무 맛있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맛이 없어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요리니까.

# 남의 열정과 평균의 속도

한지혜 소설가가 2017년 7월 18일자로 ‘경향신문’에 기고한 ‘평균의 속도에 맞추라는 사회’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 작가는 아이와 함께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대략 20년 만에 수영센터에 등록한다. 그는 초중급반의 정원이 이미 차 있고 아주 오래전에 영법을 다 배웠다는 이유로 중상급반에 배정된다.

▲ 사진: pixabay

수영 배운 지 너무 오래돼 영법이 서투른 것은 물론, 다른 회원들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 회의감에 빠진다. 수영하러 수영장에 왔는데 다른 회원들 진로를 방해할까 눈치 보기 바쁘다. 어찌어찌 마지막 날까지 센터에 나갔는데, 그날 주어진 자유수영 시간에 가장 즐겁게 수영을 했단다. 정해진 규칙도 순서도 없이 그저 내가 물장구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방향대로 나아갈 수 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물살을 갈랐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부진한 수영 실력을 안타까워한 한 회원이 옆을 지나가면서 그에게 말하길... “정말 느린데, 정말 잘하시네요.”

[리틀 포레스트]의 재하(류준열 분)는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취업했지만, 상사의 ‘갈굼’에 책상을 박차고 나온다. 고향으로 내려온 재하는 아버지의 과수원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져 애써 키운 사과들이 땅바닥에 나뒹군다. 그 처참한 광경을 재하와 함께 마주한 혜원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도리어 재하는 “농사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며 덤덤하다. 혜원과 술잔 기울이며 재하는 “남의 열정 안에서 살기 싫었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를 밝힌다. 남의 열정, 다른 말로 평균의 속도. 분명 나의 속도, 나의 방향이 있는데 세상은 자꾸 “더 빨리 더 위로”를 외친다. 정말 느려도, 그 누구보다 잘 헤엄쳐 나갈 수 있는데 말이다.     

▲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리틀 포레스트]가 요리만큼 비중 있게 다루는 소재는 농사다. 농사야말로 ‘작위적인’ 평균의 속도가 아니라, ‘자연의 속도’에 맞춰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도심 속에서 1년은 365일이지만, 농촌에서의 1년은 봄·여름·가을·겨울이다. 평균의 속도에서 해방된 재하와 혜원은 이 확장된 시·공간에서 자신만의 영법으로 유영(遊泳)을 시작한다.

# 골(goal)을 향한 나만의 빌드업

축구에서 골(goal)을 넣기 위해 상대 골문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빌드업’이라고 한다. 빌드업의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직접 공을 몰고 드리블 하든가, 아니면 동료에게 패스 하든가. 드리블을 할 때도 치고 달릴 것인지 헛다리를 짚을 것인지, 패스를 건넬 때 숏패스를 줄 것인지 롱패스를 할 것인지 고민한다.

▲ 사진: pixabay

우리가 강팀이라고 부르는 구단은 보통 개인기가 뛰어난 스타플레이어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출중한 개인기와 패스 능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점유율을 늘려간다. 빌드업 과정에서 많게는 수십 번의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골문에 도달한다. 반면 우리가 약팀이라 칭하는 구단은 선수들의 기량이 대체로 평범하다. 이들은 개인기보다는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한다. 빌드업 과정에서 짧은 패스보다 긴 패스를 선호한다. 단 두세 번의 패스로 상대의 골문을 공략할 때도 있다.

차츰 요리에 탄력이 붙은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엄마의 레시피가 아니라 자신만의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홀연히 자신의 곁을 떠난 엄마가 자신만의 레시피 재료가 있는 ‘숲’으로 '돌아간 것'이라 고개를 끄떡인다.

▲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강팀이 구사하는 빌드업이 무조건 옳은가? 아니다. 내가 스타플레이어가 아닌데 개인기와 패스를 한다고 될 리 만무하다. 상대가 패스를 계속 주고받고, 화려한 개인기를 부리는 걸 보면 솔직히 불안하다. 그래도 묵묵히 나의 과정에만 집중해야 한다. 평균의 속도에서 벗어나 나의 페이스대로 달려가야 한다. 엄마 친구 아들 토익 만점 받았다고, 아빠 친구 딸 대기업 인턴했다고, 대학교 동기 공무원 합격했다고 손에 쥔 연필, 칼, 악기, 꿈... 놓아선 안 된다. 축구가 그렇듯, 우리네 삶도 그렇다. 나만의 빌드업 방법을 찾아내고 가꾸어야 한다.

지금 눈앞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남의 숲에 들어간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과 재하가 그런 것처럼, 온 길 따라 되돌아가시라. 여러분의 '리틀 포레스트', 그곳에 당신이 언젠가 심은 목표(goal)의 씨앗이 진즉에 싹을 틔웠을 테니.

정일원 기자  1one@beffreport.com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 press@beffreport.com
BEST Entertainment / Football Friends 글이 주는 감동. 베프리포트
<저작권자 © 베프리포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일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제휴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ㆍ광고문의
주식회사 베프리포트  |  T/F 02-521-1793
등록번호 : 경기 아 51330  |  등록 및 발행연월일 : 2015년 11월 2일
제호: 베프리포트   |  발행인·편집인 : 정일원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민솔
발행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46길 20 선인빌딩 6F,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 2248번길 40
대표문의 : 1one@beffreport.com  |  보도자료 : press@beffreport.com
Copyright © 2018 베프리포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