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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원의 러닝타임] 축구, 헵타포드의 공놀이
정일원 기자 | 승인 2017.07.26 17:30
▲ 이미지 편집: 정일원 / 출처: Pixabay

러닝타임(running time) : 영화와 드라마의 상영 길이를 시간으로 나타낸 단위.
축구 : 11명의 ‘뜀박질’이 만드는 한 편의 영화 혹은 일련의 드라마. [편집자 주]

* 영화[컨택트(Arrival)](2016)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영화 [컨택트(Arrival)](2016)의 플롯을 관통한다. [컨택트]의 주인공 루이스는 ‘셸’(shell)이라 불리는 우주선을 타고 불현듯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헵타포드-7개의 다리라는 뜻)들의 언어를 학습한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오롯이 체화한 루이스는 시간을 인식하는 사고체계마저 헵타포드를 닮게 된다. 시간의 인과적 경계가 허물어진 루이스는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 지구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언어라는 형식의 이해를 통해 삶이라는 내용을 뒤바꾼 것이다.

축구는 형식의 스포츠다. 11명의 선수들이 ‘포메이션’이라는 형식 속에서 날래게 발을 움직인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크게는 포메이션, 작게는 포지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술의 고도화가 진행된 현대축구에서는 한 명이라도 형식에 벗어난 개인행동(감독이 특정 선수에게 자유롭게 플레이하도록 지시하는 ‘프리롤’ 역시 기본적으로 포메이션이라는 형식 위에서의 제한적 자유로움이다.)을 하면, 이내 유기체적인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조직력이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다.

▲ 2016-2017 시즌 첼시 VS 아스널전 첼시의 포메이션 변화, 2016년 9월 24일 4-1-4-1 전형을 들고 아스널에 0-3으로 패한 첼시(좌)는 2017년 2월 4일 3-4-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와 3-1 승리를 거뒀다. 4-1-4-1->3-4-3으로 전환되면서 새롭게 스쿼드로 들어온 선수는 단 3명(모제스, 알론소, 페드로) 뿐이었다. / 그래픽: 정일원, ⓒ 베프리포트

축구에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 사례는 지난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6-2017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최초로 30승 고지를 밟으며 우승을 차지한 첼시는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첼시의 안토니오 콘테 감독은 포백을 기반으로 한 포메이션을 플랜A로 삼았지만, 리버풀(1-2)·아스널(0-3)과 같은 강팀에 내리 패한 뒤 스리백 기반의 포메이션을 실험·가동했다. 이후 첼시의 ‘3-4-3 포메이션’은 프리미어리그 전체에 스리백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탄탄한 조직력을 구가하며 필승 공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수단의 변화는 거의 없이(스리백으로 전환하면서 모제스와 알론소 중용) 포메이션의 전환을 통해 일궈낸 성과였다.

형식의 이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컨택트]의 주인공 루이스를 제외한 뭇 인간들은 헵타포드의 언어 중 ‘무기’라는 단어를 표면적 의미로만 받아들여(속뜻은 ‘선물’) 외계인과 전쟁 직전까지 간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포메이션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작정 ‘적용하기’ 버튼을 누르면 ‘띵’하고 에러창이 뜬다. 콘테 감독이 과거 유벤투스의 사령탑 시절부터 3-4-3 포메이션에 통달하지 않았더라면(루이스의 직업은 언어학자였다.), 첼시는 갑작스러운 포메이션의 변화로 시즌 중·후반 더 큰 재앙을 겪었을지 모른다.

▲ 헵타포드의 언어(좌)와 축구공, 닮았다. / 사진: 영화 [컨택트], pixabay 갈무리

인간의 언어는 어느 한쪽에서 한쪽으로 ‘진행’하는 속성을 갖는다. 필자가 마침표를 향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한 ‘선형(linear) 철자’이다. 반면 헵타포드의 언어는 직선이 아닌 원의 형태다. 지향점이 모호한 ‘비선형(nonlinear) 철자’인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

포메이션은 축구공의 흐름을 도식화한 것이다. 축구공이 훑고 지나가는 수많은 좌표 중에서 주요 거점 11개를 꼽은 것이다. 포메이션의 근간이 되는 축구공은 생김새만 보면 헵타포드의 언어와 다를 바 없다. ‘공은 둥글다’라는 표현은 헵타포드의 언어처럼 방향성이 모호한 공의 속성이 반영된 격언이다. 둥근 생김새만 보면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도통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가 어느 한쪽에서 한쪽으로 진행하듯 축구공도 인간의 발에 닿는 순간 비로소 골대에서 골대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 확장된 루이스의 시간 / 그래픽: 정일원, ⓒ베프리포트

[컨택트]의 주인공 루이스는 두루뭉술하게 생긴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시간의 방향성을 상실한다. 루이스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의 진행이 아니라 ‘A/B/C/D’... 산재한 시점들을 자유롭게 노니는 '유영'(遊泳)이다. 마치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시리즈물처럼 독립된 이야기들로 존재하는(동시에 서로 상호작용하는) 시간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의 의식이 발을 딛고 있는 시점(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시점으로 의식을 날려 보내 문제 해결을 위한 힌트를 얻는다.

첼시의 콘테 감독도 그랬을지 모른다. 또 다른 시점으로 ‘스파이더캠’을 띄워 당대의 축구를 슬쩍 엿보고 난 뒤, 자신의 의식이 머물고 있는(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현대축구에 적용한 건 아닐까? 사장됐던 3-4-3 포메이션과는 다른 자신만의 3-4-3 포메이션을 도입한 콘테 감독은 포메이션이 한낱 '숫자놀음'으로 치부되는 현대축구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루이스에게 헵타포드의 언어가 지구를 구하는 무기인 것처럼, 콘테 감독에게 포메이션은 부진에 빠진 팀, 나아가 ‘포백 매너리즘’에 빠진 현대축구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하나의 ‘진법’(陣法)이었다.

▲ 때론 견고한 ‘진법’(陣法) 하나가 세상을 구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사용했던 학익진(좌)과 콘테 감독의 3-4-3 포메이션 / 사진: ⓒ 세종충무공이야기 홈페이지, 베프리포트

헵타포드는 “3000년 후 우리가 인간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인간을 도우러 온 것이다”라고 말하며 인간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선물한다.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느 날 저 멀리 축구행성에서 온 축구의 신(神)이 “먼 훗날 지구인의 축구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지구인의 축구를 도우러 왔다”며 포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선물하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

'콘테 감독을 비롯한 명장들의 전술노트는 그들의 모국어가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축구공 모양의 외계어로 쓰여 있지 않을까.'

정일원 기자  1one@beff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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